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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유라시아’ 발족 계기로 살핀 중앙아시아 고려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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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유라시아’ 발족 계기로 살핀 중앙아시아 고려인 역사
  • KORTOUR IN UZBEK
  • 승인 2019.11.0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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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 서울공원에 설치된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탑 모습. 2019년 한글날 특집 프로그램 촬영차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정길화 mbc 국장이 강제 이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타슈켄트 서울공원에 설치된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탑 모습. 2019년 한글날 특집 프로그램 촬영차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정길화 mbc 국장이 강제 이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1864년 최윤보와 양응범 두 사람이 이끌고 들어온 함경도 농민 열세 가구를 연해주 고려인 역사의 효시로 본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부터 고려인으로 불렸을까? 그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다만 대규모 국경 탈출이 이어지던 1860년대 말 러시아 탐험가 프르제발스키는 연해주 지역 조선인 정착지 방문기를 통해 ‘1860년대부터 이들은 자신들을 고구려 또는 고려 사람을 뜻하는 가우리(Kauli)로 불렀다’는 기록을 남겨 이주 초기부터 조선왕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그들만의 신천지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어느덧 20만 인구로 성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리안 타운에서는 7종의 신문과 8종의 잡지도 발간됐다. 게다가 라디오방송국까지 갖춘 이곳을 일컬어 고려인들은 ‘신한촌’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발전해가던 고려인 사회는 1937년 가을 한순간 무너졌다.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스탈린이 생김새가 비슷한 고려인으로 위장해 일본 첩자들이 연해주 지역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오판 아래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망명 작가 한진은 소설 〈공포〉를 통해 강제 이주가 시작되던 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1937년 가을, 소련 연해주 조선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승객이 되었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기차를 탔다. (중략) 어디로 무엇 때문에 실려가는지도 몰랐다.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지 못하고 다 고향에서 쫓겨났다. 차에서 태어나는 애도 있었다. (중략) 이 세상에 왔다가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오직 어머니 가슴속에 피멍울만을 남기고. 많은 노인들과 어린것들이 철도 연변에 묻혔다.’

이들을 한 달 만에 내려놓은 곳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이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살며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척했다. 그 과정에서 김병화 등 여러 명의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일부는 물이 있는 아랄해 지역으로 이주해 우즈베키스탄 쌀농사의 신기원을 열기도 했다.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초기 정착사를 한마디로 기적이라도 표현한다. 특히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높은 교육열로 자식들 공부에 헌신하는 고려인 1세대들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고려인 3세대들이 대거 주류 사회에 편입돼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뒤 독립국가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가교 역할에 적극 나서가도 했다. 비탈리 편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와 아그라피나 신 유아교육부 장관, 빅토르 박 하원의원 등이 바로 그런 모진 고난 속에서 성공한 고려인 사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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